漢書 (한서) 班固 (반고)

漢書(한서) 班固(반고)

汉书(hànshū)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전 100권으로 이루어졌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이다. 한 무제에서 끊긴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뒤를 이은 정사(正史)로 여겨지므로 '두 번째의 정사(正史)'라 하기도 한다.

처음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사기》에 부족한 점을 느꼈고, 또 무제(武帝) 이후의 일은 사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사서를 편집코자 《후전(後傳)》 65편을 편집하였다. 하지만 반표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54년에 사망하였다. 반고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수사(修史)의 일을 시작하였으나 한때 국사(國史)를 마음대로 한다는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하지만 이후 누명을 벗어 명제(明帝)의 명으로 한서 저작에 종사하게 된다. 그 자세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반고는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나라의 역사를 사사로이 개작하고 있다"(私改作國史)는 혐의로 고발당한다. 하지만 그가 소장하고 있던 문헌들이 압수되어 검토된 결과 오히려 명제(明帝)에게 난대령사(蘭臺令史)의 직책을 받아 역사 편찬 작업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된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반고에 의해 장제(章帝) 건초연간(建初年間)에 일단 완성을 보았으나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는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를 누이동생 반소(班昭)가 화제(和帝)의 명으로 계승하였고, 다시 마속(馬續)의 보완(補完)으로 완성되었다.

《사기》가 상고시대부터 무제까지의 통사(通史)인 데 비하여 《한서》는 전한(前漢)만을 다룬 단대사(斷代史)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난(亂)까지 12대(代) 230년 간의 기록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12제기(帝紀) ·8표(表) ·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그 체재(體裁)는 중국 정사편집의 전형(典型)으로서 답습되었다.《한서》는 《사기》와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곳도 있으나, 이미 후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응소(應邵)·복건(服虔)·여순(如淳)·맹강(孟康) 등 20여 명의 주석가(注釋家)가 나타났으며, 그들의 주석은 당(唐)나라의 안사고(顔師古)의 주석으로 집대성되어 현재의 간본은 모두 안사고의 주석을 부각(付刻)한 것이다. 안사고 이후의 제가(諸家)의 주석은 청나라 말기의 왕선겸(王先謙)이 엮은 《한서보주(漢書補注)》에 집대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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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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